작가노트 (2023.10. / Days Make Forest)

숲 가까운 곳에 살게 되면서부터 매일 숲을 그려오고 있다. 내 작업은 오늘 주어진 한 칸에 작은 잎들을 채우고 그 날들이 모여 시간을 담은 숲을 이루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나뭇잎이 모여 숲이 되듯 순간들이 모여 시간이 된다. 하루하루를 모아 숲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매일 비슷한 시간표와 컨디션으로 지내려고 한다. 하지만 숲은 계절의 흐름, 날씨,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으로 매일 다른 우연과 변화를 만들어 간다. 하늘과 나뭇가지, 잎 몇 장만 그리는 가뿐한 하루와 작은 붓질을 반복해서 찍어야만 하는 하루, 눈부신 연둣빛으로 채워지는 하루와 채도 낮은 초록빛의 하루, 생활과 그리기가 조화로운 하루와 그리기가 생활을 전복해 버리는 하루. 나의 매일은 비슷하게 흐르는 듯하지만 모였을 때 각기 다른 초록색으로 만들어진 조각보가 된다.
어제를 보내고 오늘을 마주한다. 어제의 붓질은 지나버린 굳은 흔적이 되고 오늘의 비어있는 칸이 나를 기다린다. 가끔 쉬어가고 싶을 때 그림에도 숨 쉴 틈을 남겼다. 첫 번째 칸을 채울 때는 기대감이, 중간쯤 채워갔을 때는 조바심이, 마지막 칸을 남겨뒀을 때는 후련함과 아쉬움이 있었다. 마지막 칸을 채우면 각각의 하루는 하나의 그림이, 숲이 되어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조금씩, 정해진 만큼 그리는 것은 생활과 작업을 함께 세워나가기 위한 방법이다. 숲을 처음 그리기 시작하던 즈음에는 생산성으로 나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은 무언가 생산해 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기보다는, 매일 정해진 무언가를 하는 것, 그럼으로써 계절과 날씨를 감각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것으로 세상의 일부인 나를 확인하고 있다. 매일 같은 것을 반복하는 힘, 그런데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분명히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농부가 긴장감에 시달리는 사무직 노동자보다 마음을 훨씬 잘 조절하여 신성에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 E.F.슈마허, 『굿워크』, 느린걸음
내 작업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중 어느 쪽일까. 몸을 통한 행위이기 때문에 육체노동이 있으면서도 생각을 구체화시킨다는 점에서 정신노동이기도 한가? 지금의 나는 작업을 육체노동에 가깝게 하고 싶다. 회사원의 마음이 아니라 농부의 마음으로 작업하고 싶다. 농부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자연을 감각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만족스러운 노동을 하는 것. 밤이 되면 어둠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며, 밝아지고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을 하는 농부의 일은 삶에 닿아있다. 오늘을 잘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삶의 모습처럼, 그런 마음으로 소박하고 흔쾌하게 오늘 주어진 작은 칸을 채워 숲을 만들었다.​​​​​​​​​​​​​​
작가노트 (2022.12. / 날, 붓질)

나는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시간’을 작은 단위로 쪼개어, 포도알을 칠하듯 꼭꼭 음미하고 싶다. 모든 날과 순간들을 가득 채워 살아내고 그 흔적을 바라보고 싶다. 캔버스 앞에서 나는 창조자이기보다 수행자다. 내 앞에 던져진 세계를 관찰하고 수용하는 소심한 관찰자다. 내 그림에서 ‘날’들은 한 칸 안에 붙잡히고, 순간들은 붓질이 되어 붙어있다.
나는 언제나 내 생활과 작업을 밀착시키고 싶었다. 풍경을 그리는 것도 처음엔 산책을 하고 싶어서였다. 아침에 뒷산을 걷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지만 언제나 바쁜 일들에 밀려났다. 그 바쁜 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작업이었으므로, 작업의 한 단계에 ‘산책하기’를 넣는다면 강제적으로 그러나 마침내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매일의 산책은 늘 어떤 변화들을 감지하게 한다. 냄새, 습도, 빛과 같은 미묘한 변화에서부터 잎이 돋거나 꽃이 피거나 눈이 오는 계절적 변화, 가지치기와 같은 인위적인 변화까지.
매일의 풍경을 기록하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리기에 앞서 캔버스에 칸을 나누고 산책로의 한 장소를 선택한다. 날마다 산책을 하며 그곳을 촬영해 그날의 칸에 풍경의 부분을 채워 넣는다. 칸과 칸을 채워가는 작업은 시간의 흐름 속에 발생하는 여러 변화들을 수용한다. 조금씩 달라지는 사진의 각도로 인해 이미지가 어긋나기도 한다. 하루는 한 칸을 위해 쓰이고, 한 칸은 하루에 의미를 채운다. 오늘의 풍경, 오늘의 칸을 마주하는 것은 마치 살아가는 감각과 비슷하다. 하루 일정한 시간, 일정한 분량의 붓질을 반복하는 것은 그날을 붙잡아 두는 동시에 살아가게 한다.
세계일보 칼럼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3년 4월 29일자 지면 수록)
손바닥 크기의 하루 - 이미솔의 아날로그 픽셀들
글.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를 기웃대는 말간 하늘빛, 풀숲 무성한 틈새마다 조용히 나부끼는 모래알, 흙 내음.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란 좀처럼 지루할 틈 없는 놀이이다. 비단 시각 경험뿐 아닌 무수한 감각과 정서, 생각이 동원되는 바라봄에 관한 이야기다. 관점을 달리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어떠한 규모의 세상도 한눈에 지각되지 않는 법이라서 그렇다. 시야에 담기는 세상은 늘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제한된 해상도의 이미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러한 바라봄을 화폭 위에 다시금 펼쳐 놓는 행위이다. 그리는 이에 의하여 경험된 감각의 채도와 정서의 명도, 기억의 밀도가 붓 끝에 묻어난다. 겪어본 시야와 익숙한 관점에 안주하는 순간 그림은 쉽게 지루해진다. 처음의 낯섦을 대면하고자 한다면 보기의 태도와 그리기의 습관을 지속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생경하게 바라보고 끈질기게 그려내기 위하여, 이미솔(30)은 나름의 규칙을 고안했다. 작업의 지속을 위한 자신과의 약속이자 일상의 삶과 회화를 연동시키고자 마련한 장치이기도 하다. 2020년에는 ‘꼬리 무는 그림’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서사적, 형태적 연결고리를 지닌 소품 회화를 연이어 제작했다. 2021년부터는 ‘근면성실장치’라고 이름 붙인 회화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후자의 근작은 전체의 화면을 격자무늬 구획으로 나눈 뒤 하루 한 칸씩 그림을 채워가는 방법으로 완성된다. 소박하지만 집요한 성실함으로, 광대한 화면을 촘촘히 잠식해 나아가는 일이다.
이미솔은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서양화전공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에이라운지(2022), 예술공간 서:로(2020), 가창창작스튜디오(2020)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였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대구문화재단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선정된 이력이 있으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올해 10월에 을지로 소재 전시공간 ‘상업화랑’에서 개인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 한 칸의 하루, 더할 나위 없는
화면을 매일의 구획으로 나누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2022년 3월’(2022)은 하나의 커다란 캔버스에 수직 수평의 선을 그어 30개의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 작업한 회화다. 한 달의 시간을 한 칸의 하루로 분배하여, 어제를 의식하고 내일을 상상하면서 오늘의 회화를 수행하는 일이다. 시선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간다. 처음과 끝이 명확한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작은 날들을 섬세하게 감각하는 과정이다.
한편 ‘2월부터 11월까지’(2022)는 총 100개의 소형 캔버스를 나열하여 구성한 작업이다. 부분의 집합이 전체의 풍경을 암시한다. 날마다 대하는 화면이 서로 동떨어져 있다 보니 그날의 그리기에 보다 몰입하게 된다. 조금 더 긴 시간을 호흡하며 분리된 매일을 기록하는 일이다. 열 달의 시간, 백 일의 기록이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둔 채 어긋나듯 이어지며 하나의 환영을 만들어 낸다. 작가의 시간은 부분에서 전체로 흘러간다. 화면 간격마다 띄운 여백이 몇몇 순간들을 말 줄임표처럼 감추어 둔다.
날마다 같은 크기의 그림은 역설적으로 매일의 다름을 눈에 띄게 드러낸다. 하루에 한 칸씩 제한된 규칙이 도리어 우연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작업의 속도가 정해둔 일과에 늘 알맞게 떨어지지 않는 탓이다. 때로는 하루가 보통의 날보다 길어 평소보다 넘치도록 응시해야 한다. 유난히 짧게 지나간 어느 날 못다 채운 공백은 직관적 붓질로서 메워내기도 한다. 붓에 실린 감정의 동요가 시간을 가쁘게 밀어낸다. 한 달을 하루로 소분하거나, 하루씩 열 달을 손꼽아 쌓는 과정은 나날이 변화하는 주위의 색채를 보다 민감하게 감각하도록 이끈다. 이미솔의 하루는 손바닥만한 규모로, 다만 매번 다른 채도와 질감으로 생동한다. 나뭇가지의 하루, 잎사귀의 하루, 쌓인 낙엽들의 하루가 저마다의 자리 위에 안착한다.
○ 세상의 해상도를 조율하기
도심 가장자리에서 발견한 야생 식물들의 군집이 화면에 주로 등장한다. 이미솔은 근처의 산에 올라 자연을 만지고 바람을 맡는 습관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일상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적당히 낯선 들판의 일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2022년 3월’의 화면이 소재로 삼은 것은 빛바랜 수풀이다. 특별할 것 없는 대상의 30가지 면모를 꾸준히 탐구하는 시선은 때로 뒤편의 하늘을 향하고, 때로 전경의 꽃송이를 본다. 무던한 모양은 물감에 묻어두고 눈길 가는 요소는 더 또렷이 당겨온다.
주어진 장면을 어떠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얼마나 세밀하게 그릴 것인지 결정하는 일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세상의 해상도를 회화의 방식으로 조율하는 과정이다. 실재하는 장소의 원근은 회화의 화면 위에서 흐트러진다. 장면을 확대하여 들여다볼수록 하루는 길게 늘어진다. 미시세계를 탐험하는 시선은 같은 시간을 세밀하게 쪼개어 낸다. 축소하여 멀리 볼수록 그 하루는 간략해진다. 거시세계를 내다보는 관점은 관조적인 마음을 이끌어낸다. 온전히 관측할 수 없는 세상의 부분을 탐험하며, 시야의 조리개를 다채롭게 조절해가는 일이다.
이미솔의 아날로그 회화는 디지털 매체와의 긴밀한 협업 하에 제작된다. 포토샵 등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후가공한 풍경 사진이 회화의 소재가 된다. 그는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오차들로부터 회화의 의미를 발견한다. 촬영 및 편집 중에 끼어드는 직관적 선택과 손으로 그리는 몸짓 가운데 일어나는 우연한 사고들이 보편적 풍경이 고유한 그림으로 탈바꿈하도록 한다. 이미지가 맞닿는 지점에서 형태와 색채는 완벽하게 연결되지 않으며 다소 어긋난 채다. 불완전한 경계 처리가 분절된 하루의 구획을 두드러지도록 한다.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그림 사이 관계는 삶 속에서 경험하는 매일의 모습과 다름없다.​​​​​​​
○ 아날로그 픽셀들과 비운 공백들
이미솔은 수평적으로 나열되는 매일의 병렬구조에 관심을 둔다. 개별적 하루의 밀도보다 반복된 하루들의 부피에 주목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피드 위에 차곡이 축적된 매일의 이미지가 하나의 격자무늬 정체성을 이루어내는 것처럼. 나열된 단칸의 이미지들은 마치 그의 기억을 구성하는 아날로그 픽셀들 같다. 조각조각 쌓여가는 기억의 한 지점을 포착한 장면 같기도 하다. 화면은 디지털 시대 한가운데서 회화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고집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닮았다. 시야의 조리개를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하루는 매번 다른 그림이 된다. 날마다 다른 감도와 색온도로서 빼곡히 채색한 픽셀들 사이 비워둔 공백이 종종 보인다.
‘보스턴에서 온 풍경’(2021)은 24개의 개별 캔버스로 구성한 작품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가족이 매일 같은 장소를 촬영해 보내준 풍경 사진이 소재가 됐다. 날씨에 따라 변화하는 장면의 모습을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여 날마다 한 부분씩 그려 나갔다. 간혹 사진을 전달받지 못하는 날이면 그 하루의 자리를 비워 두었다. 구멍 난 정보처럼, 탈각된 기억처럼 여백이 드문드문 생겨났다. ‘2022년 6월’(2022)은 날마다 변화하는 밤의 미묘한 색채를 포착하고자 30개 개별 캔버스로 구성한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비워진 공백마다 설치 장소의 벽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자리의 픽셀 다수가 소거되면서 전체의 화면은 정형화된 사각의 틀에서 벗어난다. 두 작품의 빈칸들은 비정형의 결과물을 유도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한편 하나의 캔버스 위에 구획을 나누어 그린 ‘2022년 3월’에서는 쉬어간 빈자리가 초벌의 붓 자국을 말갛게 드러낸다.
공백들이 유연한 숨을 쉰다. 아쉬운 부재라기보다 쉬어감을 허락하는 포용이다. 몇몇 하루를 미지의 괄호 속에 넣어둔 채 이튿날의 그리기가 지속된다. 못내 비좁은 한 칸의 여백이 때로 버겁도록 광활할지라도, 줄곧 머무르지 않으며 내일을 밟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란 그로써 의미 있는 유희이다. 하루와 하루 사이 이지러진 경계를 감각하면서, 불충분하기에 고유한 기억의 픽셀들을 모아 가면서. 매번 다른 진폭으로 생동하는 하루를 붙들고자 하는 회화는 그러한 바라봄을 위한 노력일 터다. 동시대의 마음으로 익숙한 재료를 쥐고, 매일의 끈질긴 그리기를 고민하는 여정의 한 가운데서 말이다.
전시서문 (개인전 《날, 붓질》 (2022, 에이라운지))
하루 몸짓의 기록 / 글. 추성아

이미솔은 공간을 파편적 부분으로 쪼개어 시간의 단위로 지정한다. 작가는 특정 공간을 지목하기에 앞서 공간이 갖고 있는 장소적 특징과 거리가 먼, 그곳에 살포시 내려앉는 주관적인 시간의 감각을 관망한다. 이때, 시간은 빛, 온도, 바람과 같은 기후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는 풍경의 순간과 뒤섞이는 계절감에 반응한다. 외부요인에 의해 시각을 자극시키는 풍경 혹은 대상의 모양, 윤곽, 대비, 움직임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미적 감각에 시각 장면의 특정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왔다. 지각된 풍경이 직관적으로 각인되어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제각각일 수밖에 없듯이, 결국에 우리는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풍경의 도식을 적용하여 보이는 대로 보는 것보다 알고 있었던 대로 묘사하게 되는 훈련을 받아왔다. 이와 같은 무언가를 ‘보는’ 것은, 총체적인 감각기관으로부터 수용 가능한 여러 가지 정보에 의해서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보다 대상의 이미지를 바라보고, 의식 혹은 마음에 비쳐진 대상으로 수용하는 것이 지금 우리 주변에 대부분의 것을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전시 <날, 붓질(Painting for a Day)>은 ‘본다는 것’을 더욱 미시적 관점으로 분해해서 다시, 하나씩 보기 위해 일상 루틴에서 자신의 신체를 지정된 시간의 틀에 밀접하게 연결함으로 몸짓과 그리기의 관계에 주목한다. 이미솔은 ‘시간’을 작은 단위로 쪼개어 풍경을 파편적으로 보되, 그가 설정한 부분들의 색과 형태를 ‘하루’라는 시간의 단위 안에 연동하는 자신만의 수행적인 과정을 거친다. 작가가 결정한 풍경은 대상의 전체를 대상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캔버스 화면 위에 가장 먼저 구획을 나눈 그리드에 하루치를 그리기 위한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하루 한 칸씩 최선을 다해 화면 속 화면을 대하는 순간, 작은 화면은 더 이상 대상의 부분이 아닌 작가가 산책하면서 감지했던 감각들을 되살려 전체와 분리된 작은 세계를 구축한다. 어쩌면, 여기서 구축한다는 표현보다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더욱 작은 단위의 요소들을 정교하게 포착하는 행위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더욱 좁혀진 세계관의 기록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 칸씩 단위의 풍경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가면서 어느새 해가 뜨거나 떨어지는 시간 차가 이동하고, 계절감이 변화해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전체를 조망하면 해가 저물어 있고,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을 법한 지점이 어디쯤이었을지 상상하게 되며, 계절이 어느 시점에 바뀌었을지를 감지하게 된다. 이렇듯, 계절의 시간과 속도를 파악할 수 있는 전체이자 각각의 화면은 부분적으로 탈각된 것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함께 조성되어야 부분과 전체를 조망하는 형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상의 형태와 구조의 특징에 따라 드러나는 붓질의 감각은 완전히 다른 성질로 변화하면서 작가는 그에 가장 적절한 그리기를 시도하게 된다. 반면에, 쉬었던 하루는 유닛을 비워 둠으로써 초벌과 같은 밑 색을 칠한 붓터치가 그대로 노출되도록 하는데, 과감히 그리지 않은 날들의 여백이 사실상 화면을 비운 느낌이라고 하기에 관객에게 표면 이면의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한다. 이때 표면 위 형식으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포토 몽타주와 같이 이미솔이 노출 값을 다르게 하거나 시간이 변화함에 따라 렌즈에 포착된 장소의 부분을 사진으로 콜라주한 형식이 화면 위 단위와 파편적인 화면과 연동되어 부각되고 있다.
특히, 파편적 밤풍경을 담은 <2022년 6월>(2022)은 유닛들이 각각의 독립적인 캔버스로 분류되어 이때 발생하는 여백을 빈 벽으로 남겨 둠으로 비어 있는 시간들이 기록되지 않은 시간으로 소거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밑 칠이 드러난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보다 완전히 휘발된 시간이 되어, 다음 차례여야 하는 부분 풍경이 달력을 찢어 버린 것처럼 삭제되었다. 대상의 부분 묘사가 두드러진 다른 작업 시리즈에 비해 어둠 사이에 묘사된 물성을 상대적으로 뭉갬으로써 해당 작업은, 붓질 자체에 집중되기보다 밤이라는 특정 시간의 맥락 위에 작가가 눈으로 훑고 간 흔적들을 추적하게 된다. 시간 위에 존재했던 특정 장소의 파편은 마치 그곳에 원래 없었던 것처럼 비워진 시간에 대한 흔적을 고민하고, 우리가 감각하는 풍경의 이미지는 무엇일지 질문을 던지면서 시공을 과감히 드러내 버린다. 각각의 캔버스 위에 흩어진 어둠은 미묘하게 다른 색과 표현으로 포착되어 이미솔이 밤 시간을 붓질의 방식을 달리 선택하여 시간을 뭉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연작은 이례적인 경우로 작업 전반은 ‘붓질’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리기의 해와 달을 표기한 <2022년 3월>(2022), <2월부터 11월까지>(2022)와 같은 작품 제목은 건조하게 기록의 태도로서 자신의 회화적 세계관을 구축해가고자 하는 이미솔의 의지를 볼 수 있다. 화면 속 유닛들은 달력의 낱장을 한 장씩 뜯어 열거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을 담으려는 의지와 동시에 그리기의 행위 자체가 시간 위에 하루의 흐름 안에서 수행되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한다. <2월부터 11월까지>는 월별 기준으로 캔버스 위에 기록한 ‘산책’이라는 신체의 움직임에 가까우면서, 붓질이라는 짧은 거리감의 몸짓이 각인된 신체적 운동이 보다 넓은 단위의 월력으로 쪼개는 해를 세는 동양의 방식이 적용되었다. 이처럼, 시간의 단위를 일상의 몸짓에 빗대어 소소한 수행의 과정 위에 연동시키는 태도는 작가에게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곧 시간 위에 변화하는 분절된 화면이자 빛에 대한 관심이 밑바탕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 산보자가 되어 반복적인 하루 주기를 체화하고 그에 맞춰 붓질을 지속한다는 것은, 결국에 대상을 재현하는 목적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페인터가 취할 수 있는 하루의 실천이자, 대상을 보려는 방식과 그리기의 일치를 가장 기초적인 몸짓으로 가져가는 사적인 기록과 같다.
전시평론 (개인전 《task1: 꼬리 무는 그림》 (2020, 가창창작스튜디오 스페이스 가창))
보이지 않는 규칙을 따라 그린 그림, 그 규칙을 추적하는 관람
글. 신보슬 (큐레이터)

<꼬리 무는 그림>의 이야기는 C라는 회사원에서 출발한다. 아침 7시 기상-8시 출근-12시 점심-6시 퇴근-퇴근 후 약간의 여가-12시 취침. 정작 당사자에게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일지 모르겠지만, 정해진 출근 시간도 없고, 마땅히 가야만 하는 곳도 없는 작가는 회사원 C가 부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작가는 결심한다.
“규칙을 만들자”
작가는 그 규칙을 테스크Task라고 불렀다. 첫 번째 테스크는 사물과 흔적을 소재로 작업하면서 만들어지는 순환의 과정을 다시 작업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작품1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나온 마스킹 테이프 뭉치와 같은 덩어리는 작품2의 이미지가 되고, 작품2를 제작할 때 파생된 사물이나 흔적들이 작품3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은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고 이어져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규칙을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 50점의 <꼬리 무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꼬리 무는 그림>의 작품들에는 규칙이 보이지 않아 흥미롭다. 작가는 나름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그림을 그렸지만, 그 규칙은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사실, 작가의 친절한 설명을 듣지 않는다면, 전시된 작품들이 특정 규칙에 의해 그려졌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각각의 작품은 규칙 없이도 완성도 있게 존재한다. 만일, 한눈에 작가의 규칙이 파악된다면, 작품을 보기 전, 규칙을 찾아 맞추기에 바빴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렇다. 작품 제작방식이나 작품 안에 어떤 규칙적인 단서가 나타나면, 단서를 쫓기 바쁘다. 다행히 <꼬리 무는 그림>의 작품들은 그렇지 않다. 규칙을 모르고 보아도 충분히 작품을 즐길 수 있고, 규칙을 알고 보면 작품 보는 새로운 재미가 생긴다.
<꼬리 무는 그림>의 작품들은 구체적인 대상을 그렸지만, 한눈에 파악되지 않아 흥미롭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버려지는 마스킹 테이프 뭉치, 작업실에서 흔히 보이는 일회용 종이컵 등 하나하나 따져보면 다 아는 사물들이지만, 캔버스 속 이미지는 닮은 듯 닮지 않았고, 익숙한 듯 낯설다. 그래서 자꾸만 자꾸만 그림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규칙을 알고 나면, 이 작품의 어디가 다음 작품의 소재가 되었는지 궁금해지면서 더더욱 오래 그림 앞에 서게 된다. 마치 사건 현장에서 단서를 찾는 형사처럼, 꼼꼼히 샅샅이. 시선은 그렇게 그림을 훑는다. 누군가는 그런 관람방식은 제대로 된 작품관람이 아니라고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을 관람하는 데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무런 선입견 없이 둘러보던 작품에서 단서를 찾아 또 다시 다르게 관람하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같은 작품을 다르게 보기. <꼬리 무는 그림>은 그렇게 계속 다르게 볼 수 있는 전시다. 선입견 없이 그림을 보는 눈으로 혹은 단서를 추적하는 추적자의 눈으로.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이 남아 있다. 작가는 왜 하필 50점이었을까? 왜 그것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전시 방식을 택했을까? 하나의 벽을 가득 채웠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그린다면 평생을 그려도 그릴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많은 작품들은 어떻게 보관할까? 그리고, 테스크를 마친 지금 작가는 만족할까?
회사원C에서 시작한 작가의 규칙 만들기는 생각지도 못한 많은 질문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아직, 작가는 여기에 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테스크로 이어지지 않을까? 꼬리를 무는 그림처럼, 테스크를 이어가는 테스크. 작가의 두 번째 테스크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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